Published : 2012/04/08 16:03
지난 글에서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확장과 독일 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글은 추가로 열강들의 아프리카 착취에 대해서 살펴보고, 특히 가장 잔혹했으나, 일반인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벨기에의 콩고 착취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럼 지금부터 아프리카의 슬픈 식민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세계사 시간 제국주의 부분에서 꼭 삽화로 등장하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바로 흑인을 압착기에 넣고 착취하는 풍자화이다. 이 풍자화는 4컷중의 일부이고, 국가간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나는데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 보도록하자.
1. 독일제국
<독일 식민지 풍자화>
이곳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를 묘사한 것이다. 기린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추어 서있고 악어 같이 위험한 짐승들은 철망을 통해 입을 막아 놓았다. 기린들을 지휘하는 독일인이 그려져 있으며, 옆에 나무를 보면 규칙 등이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삽화를 보며 독일인들은 융통성 없는 민족이며 그 점을 웃음거리로 묘사한거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사실과 이와 다르다.
지난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독일인들은 식민지 지배 경험이 다른 열강들에 비해 거의 없었기에 초창기에는 시행착오를 겪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점차 그 지배방식을 개선하여 결국 원주민들의 협력을 이끌어내었고, 독일인들은 원주민들을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육과 계몽을 중시했고, 특히 원주민들을 위한 의료기관의 설립과 의료활동 역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래서 본 기자는 이 삽화는 당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던 원주민들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질서를 부여해준 독일인들의 계몽적 사고를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악어로 상징화된 위험한 요소들은 법과 질서를 통해 막아주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다른 열강들의 그 어떤 식민지에서도 독일인들처럼 활발하고 열정적인 원주민 교육을 보여주지 못했고, 원주민들의 열정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는 오직 짧은 시간동안 그것도 상대적으로 아주 늦게 식민활동에 뛰어든 독일제국만이 가능했던 일이다.
2. 대영제국
<영국 식민지 풍자화>
이 풍자화는 각종 교과서에 실려있는 아주 유명한 삽화이다. 어떤 특정국가가 아프리카 식민지를 어떻게 착취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유럽의 아프리카 착취에 대한 사실은 어렴풋이 떠올리게 해주는 그림이다.
그러나, 이 풍자화는 바로 영국의 식민지를 묘사한 것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영국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식민지인들을 착취해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흑인들에게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식량만을 허용하면서 압착기를 통해 금화를 낳게 만드는 모습에서 그들이 얼마나 심한 착취를 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에서 보이는 성직자의 모습도 인상깊다. 선교라는 미명하에 그들의 정신세계를 파괴하고, 그들의 정신문화를 지배하려고 했던 것이 종교를 앞세운 제국주의였다. 해가 지지않는 나라라고 불리던 대영제국은 이런 착취와 학살을 통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잔혹한 통치방법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행해졌으며, 특히 영국인들의 제국주의적 추악함은 보어전쟁을 통해 잘 드러났다.
<대영제국의 판도>
3. 프랑스
<프랑스 식민지 풍자화>
이 풍자화는 프랑스의 식민지를 풍자한 것이다. 이미 한쪽에선 흑인 여성과 서로 희롱하고 있는 프랑스 병사가 보이고 있으며, 정면에서도 흑인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하고 있는 있는 추잡한 프랑스 병사가 보인다. 그 옆에서 보고 있는 흑인 아이가 무엇을 보고 느끼며 성장했을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자.

<프랑스 식민제국의 판도>
아프리카의 식민통치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례가 다음에서 살펴볼 벨기에라면 문화통치라는 미명하에 원주민 언어와 문화의 말살을 국가적으로 시도했던 국가는 바로 프랑스일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단순히 착취와 업악이라는 지배목적을 넘어서, 그들의 식민지 전체를 프랑스화하려고 노력했다.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의 고위 인사가 프랑스의 외교관을 모독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명분으로 알제리에 공격을 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제리를 무력으로 정복했다. 프랑스인들은 이후 알제리에 집단거주지를 형성했고, 이 당시만해도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에서 제일 먼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알제리, 알제리는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였다>
1871년, 독일에게 먼저 전쟁을 선포하고도 패했던 프랑스는 그들이 강점하고 있던 엘자스-로트링겐(Elsaß-Lothringen) 지역을 반환했다. 이는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으나, 그렇다고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독일 제국에게 복수전을 벌이기도 어려웠다. 프랑스는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는 방편으로 아프리카로 식민지를 확대하는 작업을 왕성하게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의 지성인들도 이 같은 움직임을 부추겨 그럴듯한 명분과 논리로 식민지 개척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열강들은 베를린에 모여 아프리카를 분할하기 위한 경계를 확정하는 회의를 열게 된다. 이 회담의 결과로 프랑스는 열강들로부터 서부 아프리카의 지배권을 인정받고 영국,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는 몇몇 해안지대를 제외한 서부 아프리카에 대한 통치자가 되었다. 한편 총회에서 각국은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포함한 콩고 분지를 중립지대로 선언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국은 이 사실을 무시하고 그 지역까지 전쟁을 확대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아프리카에 대한 문화적 이해는 단순 명료했다. 아프리카 문화는 열등하기에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통치 행정기관들은 서부 아프리카에 프랑스어를 보급했다.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우월감'에 사로잡힌 프랑스인들은 원주민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고 프랑스의 문화와 언어를 이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으며, 지금도 그 영향으로 서부아프리카의 국가들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사람 수급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일본인들만 행한 만행이 아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일본에 의한 36년간의 식민통치의 경험을 가진 한국인들은 프랑스의 통치방식이 어떤 것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프랑스인들의 문화통치 방식으로 그대로 모방하여 한국어와 한글을 말살하기 위해 노력했고, 일본어를 보급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21세기 현재까지 치를 떠는 일제의 만행은 일본이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 단지 영국과 프랑스 등 서양열강의 통치방식을 모방했을 뿐이다. 알제리의 치열한 독립과정은 후일 후속기사로 다루기로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4. 벨기에
<벨기에 식민지 풍자화>
위 그림은 수많은 식민 통치의 역사중에서 가장 사악한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레오폴드 2세의 모습이다. 원주민의 목을 절단하여 식탁에 올려놓고, 몸은 익히는 중이며, 태연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레오폴드 2세의 모습에서 그 잔학성을 엿볼 수 있다.
<학살자 레오폴드 2세>
레오폴드 2세 (Leopold Lodewijk Filips Maria Victor)는 벨기에 왕국의 2대 왕이다. 브뤼셀에서 레오폴드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65년 대관식을 치렀고 죽을때까지 왕의 자리를 지켰다. 레오폴드 2세는 주로 콩고 자유국의 창립자이자 지배자로 유명하다. 그는 해외식민지를 향해 탐욕의 손길을 뻗쳐, 결국 1885년 개인 소유의 콩고 자유국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콩고인들을 무자비하게 다뤘고 수백만 콩고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결국 벨기에 의회에 의해 소유권을 벨기에 정부로 넘겨주게 되었다.
<레오폴드 2세의 풍자화>
레오폴드 2세는 해외식민지를 건설하는 것만이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고 해외식민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몇 차례의 실패 후 1876년 과학, 박애주의 단체로 위장한 국제아프리카협회란 지주회사를 만들었다. 1876년 이 지주회사를 통해 그는 유명한 탐험가 헨리 스탠리를 고용해 콩고 지역을 탐사하도록 하였다. 레오폴드 2세는 여러 외교적 술수를 통해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14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그를 콩고의 합법적인 지도자로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1885년 2월 5일, 레오폴드 2세는 마침내 콩고 자유국을 선포하고 지배자가 되어 사병을 통해 다스렸다. 이 개인소유의 나라는 벨기에의 76배 크기를 가졌고 동부 미국과 비슷한 크기였다.
<본국 벨기에보다 76배나 넓은 콩고, 레오폴드 2세는 스스로 이땅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이 식민지에서의 최초의 착취의 대상은 상아였다. 하지만 이것은 예상한 만큼의 이익을 내지 못했고 고무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고무나무로부터 수액를 추출하는데 노동력을 집중시켰다. 그는 1890년대 후반부터 베를린 회의에서의 약속을 어기고 콩고에서 외국에서의 접근을 차단하고 토착인들을 강제노동자로 만들었다.
<손목이 절단된 아이들>
이 과정에서 약 수백~이천만명의 콩고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레오폴드 2세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콩고인에게 각각 고무할당량을 정해줘 그만큼 매일 채취해오게 했다. 만약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그들의 머리, 팔, 다리를 자르는 만행을 저질으며 특히 아이들의 오른손이 많이 절단당하였다. 수백만의 콩고인들이 고문당하고 살해당했으며, 그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 속에서 일하다가 사망했다.
피해자 추정
브리태니커 사전, 콩고 자유국에서 인구 최소 8백만에서 최대 2~3천만이 감소
Roger Casement, 약 3백만이 죽은 것으로 추정
Peter Forbath, 약 5백만이 살해당함
John Gunther, 5~8백만이 죽음
Adam Hochschild, 1885년에서 1920년까지 약1천만명 혹은 인구의 반이 사망
Fredric Wertham, 콩고 인구가 850만-3천만까지 감소한 것으로 추정
그의 잔혹한 통치방식과 착취에 대한 비난, 그리고 인권에 대한 요구가 세계각지에서 터져나왔다. 제국주의 시대에도 이같은 식민통치는 같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지탄을 받을 정도였다. 결국 1908년에 벨기에 의회는 그의 콩고 자유국 통치를 멈추도록 결의했고 콩고는 벨기에령 콩고로서 벨기에의 식민지가 되었다.
벨기에의 공식적인 태도는 온정주의였다. 즉 아프리카인들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보살피고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입법권을 가지지 못했고, 전통적인 지배자들은 세금을 거두고 노동력을 충원하는 중개자로 이용되었다. 협조하지 않는 지배자들은 자리에서 쫓겨났다. 1950년대말 기존 열강들이 더 이상 식민지를 유지할 능력이 부족해지자 그들에게 독립을 부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벨기에는 아직도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시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1958년 패트리스 루뭄바가 '콩고 민족운동'을 결성했고 1959년 1월에는 레오폴드빌(지금의 킨샤사)에서 폭동들이 일어났다. 벨기에는 이러한 저항에 굴복하였고 1960년 6월 30일 콩고는 독립공화국이 되었다. 지금도 콩고는 최극빈국 중 하나이며 정치, 경제는 낙후되어 있고, 수많은 테러로 인해 무수한 인명이 죽어나가고 있는 곳이다. 콩고는 한 국가에 대한 억압적인 착취가 국가 하나를 오랫동안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례이다.
<레오폴드의 콩고인 학살에 대해 가장 잘 서술되어 있는 책>
아담 호크쉴드가 저술한 레오폴드 왕의 유령(King Leopold's Ghost)은 레오폴드 왕의 콩고인 학살을 가장 잘 서술한 서적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은 독자들은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하며, 책속에 서술되어 있는 기록을 일부 인용하며 벨기에의 콩고 착취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려고 한다.
레오폴드 왕의 유령 중에서...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병사들은 포로들을 죽이는 데 익숙해져갔다. 어떤 경우에는 한번에 포로 30명을 죽였다. 교전이 끝났을 때 “우리는 6주 동안 고통스럽게 행군했고 9백 명 이상의 남자, 여자, 어린이를 죽였다.” 왜 그런 학살을 저질렀을까? “월간 고무 수확에 총 20톤의 생산량을 추가하기 위해서였다.”
1894년 피에베즈의 초소를 통과한 적이 있는 한 공안군 장교는 피에베즈의 말이라며 이런 상황을 전했다. 피에베즈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그가 요구한 물고기와 카사바를 내놓지 않자 어떻게 대응했는지 말해주었다. “나는 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시범은 딱 한번만 보이면 충분합니다. 흑인 백 명의 머리를 자르니까 그 다음부터는 주재소에 물자가 풍부하게 들어오더군요. 나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나는 1백 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나머지 5백 명을 살렸습니다.”
이제 런던에 근거지를 둔 스탠리는 곧 ‘아프리카 쟁탈전Scramble for Africa’의 첫 소문을 듣게 되었다. 철도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증기선으로 확실하게 산업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유럽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영웅, 즉 아프리카 탐험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수 천년 동안 아프리카 대륙에서 살아온 사람들로서는, “발견할 것은 없었다. 우리는 늘 거기에 있었다.”라고 말한 훗날의 어떤 아프리카 정치가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의 일부 오지를 ‘발견’한 탐험가들을 찬양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그들이 차지하겠다는 것을 예고하는 행위였다.
지금도 각종 미디어는 착취와 인종범죄의 대명사로 독일을 내세운다. 1945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정의한 '반인도 범죄'는 독일에 한정하여 모든 책임을 전가하였고, 연합국 측 열강들이 벌였던 2차대전 중의 전쟁범죄와 수백년간 자행되어 왔던 식민지범죄가 은폐되었다. 승전국 서구열강들의 세계지배와 과거세탁은 아직도 진행중이지만 모든 역사적 진실은 감추어질 수 없다. 아프리카 식민지역사의 증언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독일 역사 다음편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 배경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8편에 계속>
[##_kaAmo_##]
"아리안역사" 분류의 다른 글
| 1월 12일, 아리안 소사 | 2012/01/19 |
| 1월 6일, 아리안 소사 | 2012/01/07 |
| 1월 9일, 아리안 소사 | 2012/01/12 |
| 1월 25일, 아리안 소사 | 2012/05/15 |
| 1월 10일, 아리안 소사 | 2012/01/12 |
| 제국의 룸살롱 살롱키티(Salon Kitty) | 2012/05/22 |
Tags: 1차 세계대전,
King Leopold's Ghost,
Kongo,
Leopold Lodewijk Filips Maria Victor,
Scramble for Africa,
계몽,
고무,
고무테러,
국제아프리카협회,
기독교,
기린,
대영제국,
독일 제국,
독일령 동아프리카,
레오폴드 1세,
레오폴드 2세,
레오폴드 왕의 유령,
문화통치,
반환,
베를린,
베를린 회의,
벨기에,
보어전쟁,
분할,
브뤼셀,
상아,
선교,
선교사,
성희롱,
손목절단,
스페인,
식민지,
식민통치,
아담 호크쉴드,
아프리카,
아프리카 쟁탈전,
악어,
알제리,
알제리 전쟁,
언어,
엘자스-로트링겐,
여성,
영국,
외교관,
이탈리아,
인권,
일본,
일제,
자존심,
전범국가,
전쟁명분,
제국주의,
지성인,
지주회사,
착취,
콩고,
콩고 분지,
토속 신앙,
패트리스 루뭄바,
풍자화,
프랑스,
프랑스어,
학살,
헨리 스탠리,
흑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재밌게 읽었습니다...참 대단한 역사를 가진 나라들이군요...식민지 지배를 경험한 나라들 거의 대부분이 이 사실을 깨달은것 같습니다" 땅도 좋지만 그 땅을 관리할 인건비 역시 무시못한다...그냥 단물만 빼고 버리자...
글 잘 읽었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영국 소인배들이 득세를 하고 독일 대인들이 무릎을 꿇은 상황이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이후 급격히 글로벌 소인배화가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는 Things fall apart(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라는 책을 읽고 19세기말 아프리카를 상대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실제는 제 상상을 넘어서는 군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