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 2012/05/11 22:37


1888

하인켈 출생

에른스트 하인켈(Ernst Heinkel, January 24 1888 – January 30 1958)은 그룬바흐에서 태어난 제3제국의 대표적인 항공기 엔지니어이자 디자이너이다. 젊은 시절 주조기술자로 도제생활을 시작한 하인켈은 슈투트가르트 기술대학에서 수학하며 공학도의 길을 꿈꾸다 체펠린의 비행선을 보고 자신의 인생항로를 결정하게 되었다.
1911년 7월 비행기사고로 거의 목숨을 잃을뻔했지만, 그러한 사고도 비행기에 대한 집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트기의 아버지 에른스트 하인켈



Luft-Verkehrs Gesellschaft(LVG), 알바트로스사를 거쳐 한자-브란덴부르크에서 항공기 디자인과 관련된 경력을 쌓았다. 1차대전동안 그가 제작한 항공기는 헝가리군대와 독일해군에서 사용되면서 그 성능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922년, 자신의 회사인 하인켈항공기공장(Heinkel-Flugzeugwerke)을 설립한 하인켈은 일본정부의 협력 하에 군용항공기제작을 금지한 베르사이유조약을 교묘하게 위반하면서 꾸준히 작업하였다. 이당시 베르사이유조약은 독일영토의 박탈 및 무장을 금지하는 조항이 대다수로 독일에 대한 보복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제약 때문에 독일정부는 군용기에 대한 개발은 주로 일본정부와 협조하였고, 전차에 대한 개발과 운용은 소련정부와의 밀약에 따라 은밀히 연합국의 눈을 피해 진행하기도 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에른스트 우데트, 에르하르트 밀히 등의 루프트바페 수뇌부와 함께한 하인켈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나찌정부 집권 후 하인켈사는 Heinkel HE 59, Heinkel HE 111, Heinkel HE 115 등의 히트작을 양산하면서 독일정부에 의해 방위산업리더로 지정되었다.
고속비행과 새로운 항공추진형태에 대한 연구열정이 가득했던 하인켈은 항공우주로켓 기술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과 제트엔진전문가인 한스 폰 오하인(Hans von Ohain)과 공조하기도 하였고, 결국 1939년 8월 27일, 세계최초의 제트기인 Heinkel HE 178의 시험비행에 성공한다.
한때 유태인 직원 고용으로 나찌정부와 약간의 마찰이 있었으나, 방위산업리더였던 하인켈사와 정부와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하였다. 하인켈이 나찌당원이기도 하였으며 1938년에는 제3제국 권위의 상징인 '독일예술과학국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계최초의 제트기 Heinkel HE 178


제3제국 시절 대부분의 대기업이 그랬듯이 1941년, 점령지 국민과 유태인 노동자를 생산라인에 강제투입하였다. 1942년 국민총력전의 일환으로 국유화되어 실질적으로 공군원수 헤르만 괴링의 관리 하에 들어갔다.
종전 후 전범혐의로 체포되었지만 무죄방면되고 1959년 전쟁 중 강제노역혐의로 고소되었지만 역시 기각되었다.
독일을 점령한 연합국의 항공기제조금지조치로 버블카와 스쿠터를 생산하게 되었지만, 금지조치가 끝난 후에도 스쿠터의 생산은 1965년까지 계속되었다.
1956년, 자서전 <폭풍우 속의 삶(Stürmisches Leben)>을 출간하고 58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사망하였다.




1891

모델 출생

오토 모리츠 발터 모델(Otto Moritz Walter Model, 24 January 1891 – 21 April 1945)은 2차대전 당시 총통의 소방수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던 방어전의 명수로 제3제국에서 육군원수을 지냈다.
겐팅(현재 작센안할트주)에서 태어난 모델은 1909년 사관후보생으로 군생활을 시작하여 1차대전 동안 보병중대장과 작전과를 거치며 대위로 승진하였다.
종전 이후 베르사이유 조약의 군비감축조항에 따라 군대총병력을 10만명(장교는 4천명)으로 제한하는 조치에도 불구하고, 모델은 실력을 인정받아 군에 남을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이어맨 발터 모델



바이마르 정권 동안 참모와 지휘관을 두루 경험하며 1928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4군단 참모장을 맡았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폴란드전쟁과 프랑스전쟁에 참가하여 제16군 참모장, 제3장갑사단장, 제41군단장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1941년 독소전이 개시되고 파죽지세로 밀어부치던 개전 초기, 독일군은 쉽게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낙관했지만, 강추위의 엄습과 극동군을 비롯한 우랄산맥 동쪽의 소련지원군의 가세로 인해 더이상의 전격전이 어려워지게 되어 조기종전을 노리던 독일의 희망이 마치 동부전선의 전황처럼 불투명하게 되었다.

소련의 반격이 시작되자 육군총사령관 브라우히치와 참모총장 할더 및 국방군 야전사령관들은 일단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이듬해 봄에 작전을 재개하자고 청원하였으나, 히틀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모델이 후퇴하는 대신 전선을 안정화하는 적임자로 떠오르고 10여명이 넘는 선임자를 제치고 제9군사령관에 취임하게 되었다.
1942년 봄 방어선을 구축한 모델은 르제프에서 소련군의 파상공세를 견디다 전력을 집중시켜 소련군을 패퇴시켰다.
모델은 모스크바 방어선을 효과적으로 지휘하며 방어전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로인해 1942년 상급대장(대장에 해당)으로 승진하여 백엽검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브리핑받는 발터 모델. 야전에서도 모노클을 즐겨 착용하였다.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패배한 독일은 1943년 7월 4일, 전세를 되찾기 위해 최후의 보루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치타텔레(Zitadelle)작전을 감행한다. 독일 동부전선군은 쿠르스크시에 결집한 소련군을 밀어내기 위해 80만대군과 2,700대의 전차, 1,8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전격적인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를 감지한 소련군은 공격예상지점 전면에 대전차포와 지뢰를 배치하고 3,600대의 전차, 2,400대의 항공기를 투입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지상최대의 기갑전이 벌어진 쿠르스크전투에서 독일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나 병력과 재원이 한정된 독일로서는 막심한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작전이 개시된지 2주만에 시칠리아에 침공한 연합군을 막고 이탈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작전이 중단되었다. 이로써 독일군의 장기인 더이상의 전격전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소련은 개전초기 연속되는 참패 속에서 독일군이 가진 근본적인 약점과 그에 대한 대비책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모델은 쿠르스크전투에서 9군사령관으로 공세를 지휘하였지만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부전선을 시찰 중인 모델. 9군사령관시절부터 자주 최전선을 시찰하던 지휘관으로 알려졌다.


독일이 지난 1차대전 당시부터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닥치고 말았다. 그것은 전선이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져 양면전쟁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의 거센 반격과 더불어 서부전선으로 상당수의 전력이 분산되면서 동부전선의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 독일군은 진격이 아닌 전선의 사수조차 급급한 상황이 되었다. 역시나 수많은 지휘관들이 후퇴를 간청하는 상황에서 모델은 또다시 후퇴가 아닌 창과 방패(Schild und Schwert)라는 계획을 입안하하고 나섰다. 이는 모델 방어전략의 '모델'로 볼 수 있는 전략으로 방어선을 얇고 길게 분산하더라도 연속성이 단절되는 것을 막으면서 전술예비대를 분절하여 적의 침투가 발생할 시 효과적으로 집중시키는 방식이었다. 르제프 방어전에서 입증되었던 방식에 후퇴하면서(방패) 적의 헛점이 보이면 전력을 집중하여 반격(칼)한다는 것인데 히틀러가 싫어하는 어휘인 후퇴라는 말만 쓰지 않았다 뿐이지 후퇴를 간청하다 해임되던 다른 장군들과 크게 다른 개념은 아니었다.
모델은 상관의 의지를 헤아리면서도 싫어하는 표현을 삼가면서 상관이 원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유연한 현실감각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히틀러유겐트 소년들과 담소 중인 모델


모델은 이같은 방식으로 소련군을 괴롭히면서 전선을 1년 넘게 안정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즉 전열을 붕괴시키지 않고 점진적으로 후퇴하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이에 만족하여 모델을 치하하며 B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서부전선에 투입시켰다.
모델의 전술은 예하 부대의 자원손실을 감수하는 방식으로 사단급부대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지만, 탁월한 성과로 인해 불만을 잠식시킬 수 있었다.  

서부전선에 배치된 모델은 1944년 9월, 버나드 몽고메리가 입안한 멍청한 작전의 대명사인 마켓가든작전을 가볍게 분쇄하고, 이듬해 1월 아르덴공세에 참가한다.
이는 독일군의 마지막 남은 재원을 소비하면서 서방연합국에 한방을 먹여 독일의 힘을 보여준 후 불리하지 않은 조건으로 강화하여 서부전전을 종결짓고 모든 병력을 동부로 돌려 소비에트 붉은군대로부터 유럽을 지키겠다는 의도로 입안된 작전이었으나 히틀러를 제외하고는 거의 찬성하는 장성이 없었다. 모델 역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공세 초반 계획대로 기세좋게 진행되었으나 이후 자원문제와 동부전선 지원결정으로 작전이 중단되었다.
공세작전에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던 모델은 아르덴공세 이후 전쟁의 추가 완전히 기울었음을 실감하였다.
이후 독일최대의 공업지대 루르공업지대를 방어하는 임무가 내려졌다.

1945년 미국 제1군과 제2군은 루르지역을 포위하였다. 수많은 공세에서 성공리에 방어전을 수행했던 모델은 전황과 병력의 상태를 파악한 후 더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하였다.
미군의 항복권유를 거부한 후 모델은 보다 많은 인원을 구해내기 위해 급조된 국민돌격대 및 부상병과 노약자를 대상으로 전역증을 발급하여 귀가를 명령하였다. 전역증을 발급받지 못한 병력들은 자유의사대로 항복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리고 부대를 해산하였다.

해산명령에 당황하던 젊은 병사를 보고 모델은 말했다.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독일의 미래는 자네들에게 달렸어. 훌륭한 청년이 되어주게."
이같은 조치로 약 32만명 가까운 병력이 귀가하거나 항복하여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이후 모델은 해산명령을 거부한 부관과 함께 포위망을 뚫기위해 이동하다가 뒤스부르크 근교의 숲에서 권총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히틀러의 신임을 얻어 세간에서는 나찌당의 장군, 출세주의자, 기회주의자라는 시샘어린 시선과 후세의 폄하가 있었지만, 모델은 나찌와 히틀러의 존재가 독일에 필요하다고 믿었고 이를 충성과 신뢰로 실천하였다.

 '독일의 원수는 항복하지 않는다.'

이는 모델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방어전의 귀재로 불리우던 발터 모델도 자신의 신념 앞에 자신의 생명은 방어할 수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 가매장 중이던 모델의 묘는 1955년 독일군인묘지로 이장되었다.


모델은 1남 2녀를 두었으며, 아들 한스게오르크 모델(Hansgeorg Model)은 훗날 서독에서 독일연방군 소장까지 진급하였다.

[##_kaAmo_##]
2012/05/11 22:37 2012/05/11 22:37
Writer profile
author image
Hans Deutsche :
Aryantimes Editor
E-Mail : hans_deutsche@aryantimes.com
twitter : @hansdeutsche

Trackback :: http://news.aryantimes.com/trackback/284

댓글을 달아 주세요

Name:    Password:
Home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