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 2012/05/15 23:58


1972

밀히 사망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 30 March 1892 – 25 January 1972)는 제3제국에서 공군성 차관을 지낸 공군원수이다. 1892년 빌헬름스하펜에서 유태인 약사 안톤 밀히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위직을 지낸 제3제국의 극소수의 성공한 유태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1910년, 아비투어에 합격한 후 동프로이센 보병연대에 배속되어 군생활을 시작하였다.
1911년 소위로 임관한 후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포병부대에서 전쟁을 맞이하였다. 애초부터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던 밀히는 이후 1915년 항공대에 배속되어 철십자훈장을 수상하고 1916년 중위로 진급하여 쿠를란트 항공학교 부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1차대전 말기 대위로 진급하여 제6전투항공단 지휘관이 되어 종전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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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하르트 밀히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해 공군의 보유가 금지되자 비정규군인 항공지원병제412부대를 지휘하며 독일동부의 폴란드국경분쟁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항공경찰까지 금지되면서 실업자가 된 밀히는 단찌히 항공우편회사를 개업하여 업계에 안면을 넓힌 후 루프트한자독일항공(Luft Hansa)에서 근무하였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이 집권하자 제3제국의 2인자이자 공군성장관이자 제국원수인 헤르만 괴링의 요청으로 공군성차관에 취임하게 된다.
밀히가 비즈니스맨에서 고위관료로 입각하게 되자 밀히의 어머니는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유태인 아버지를 가졌지만, 밀히는 그의 아들이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유태인 하프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서류변조와 혼외자설 등으로 신분을 세탁하였다.
괴링에게는 그게 어느것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특수제작한 군복에 달린 훈장만큼이나 수많은 직함과 보직, 그리고 '마지막 르네상스인'이라는 별명답게 수많은 취미생활을 영위하던 괴링에게는 유능한 밀히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35년 유태인과의 혼인을 금지하는 뉘른베르크 인종법 즉 독일제국시민법이 공표되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부하들이 밀히를 조사하기 위해 공군성을 방문하였다. 이에 맞서 괴링은 "유태인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이들을 물리치고 밀히에 대한 의혹을 종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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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공군(Luftwaffe)의 1, 2인자 괴링과 밀히의 단란한 한때



2차세계대전 중인 1940년 7월 원수로 승진한 밀히는 1941년 항공기총감을 맡아 공군전력증강과 장비개발, 생산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영국과의 공중전 실패와 공군전력강화에 미흡하다는 이유로 입지가 좁아져 업무스트레스로 자살한 에른스트 우데트의 뒤를 이어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업무 특성 상 1942년 군수장관이 되기 전부터 육군과 공군 건설 및 군수지원업무를 담당하던 알베르트 슈페어와의 업무협조가 필수적이었고, 밀히와 슈페어의 업무분장으로 상당한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승승장구하던 밀히는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독일제6군에 대한 보급의 책임을 맡는다.
하지만, 기상악화와 승무원, 항공기, 비행장 등 보급과 관련된 모든 악조건으로 인해 스탈린그라드 패배에 대한 공군측 책임을 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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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페어, 에르하르트 밀히, 빌리 메서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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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군수업무의 파트너, 슈페어와 밀히



1944년 이후 연합군 공군에게 제공권을 빼앗겨 독일본토에 대한 공습이 심화되자 군부 내에서 밀히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게다가 연속되는 실패로 무능의 대명사가 되어 제3제국 내에서 권위가 추락한 헤르만 괴링으로 인해 밀히 또한 더욱 곤란을 겪게 되었다.
독소전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밀히는 요제프 괴벨스와 하인리히 히믈러를 설득하여 독소전 공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괴링이 가진 공군의 전권을 박탈하려고 시도하였지만, 히틀러가 이를 거부하자 반대로 괴링이 밀히를 제거하기 위해 슈페어의 군수생산에 대한 권한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같은 배경 하에 1944년 8월, 국민총동원의 일환으로 군용기생산의 대부분을 점유하던 전투기생산에 대한 권한이 슈페어의 군수성으로 이관되면서 총감업무에 대한 실권마저 잃게 되었다.

종전 이후 연합군에 체포되어 뉘른베르크후속재판(Subsequent Nuremberg Trials)에 기소되어 군수생산분야에서의 점령지국민에 대한 강제노동혐의가 인정되어 1947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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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의 밀히



1951년 수감 중 감형되어 1954년 출소하여 경영컨설턴트로 변신하여 뒤셀도르프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1972년 부퍼탈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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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성 차관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 국방군최고사령관 빌헬름 카이텔(Wilhelm Keitel),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Walther von Brauchitsch),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라에더(Erich Raeder), 막시밀리안 폰 바이크스(Maximilian von Weichs) 1938년 9월 12일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원수와 제독이 모여 한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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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5 23:58 2012/05/15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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