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 2012/01/29 05:12


1930

호르스트 베셀 피습

호르스트 루트비히 베셀(Horst Ludwig Wessel , October 9 1907 – February 23 1930)은 베스트팔렌 빌레발트에서 1차대전 종군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나찌당의 초기멤버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베셀은 청소년시절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이끌던 독일국가인민당 소속의 비스마르크 유겐트로 집단생활을 시작하다 나찌당의 돌격대(SA)로 옮긴후 돌격대분소 세포지도자가 되었다.
이후 베셀은 베를린 관구장 괴벨스의 지시에 따라 19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국가사회주의 청년연맹의 조직과 활동방식을 연구하였다. 1929년 3월에 지은 시 '깃발을 높이 올려라'는 베셀 사후 괴벨스에 의해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로 재탄생되어 제3제국의 애창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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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살의 꽃다운 나이에 테러에 의해 숨진 호르스트 베셀>

베를린으로 돌아와 청소년교육사업에 힘쓰던 베셀은 노동자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활동에 매진하게 되고 그로인해 공산당의 폭력기구인 붉은전사연맹의 살생부에 오르고 만다. 그당시 베셀은 헌신과 애정으로 매춘굴에서 구해낸 애인 에르나 예니헨과 그로세 프랑크푸르트 거리에 있는 허름한 집에서 동거중이었다.
1월 14일, 베셀과 밀린 월세로 실랑이를 벌였던 집주인 잘름은 사별한 공산당 남편의 동지들에게 베셀의 위치를 밀고한다. 베셀의 위치를 파악한 알베르트 횔러와 에르빈 뤼케르트 등 공산당 폭도들이 베셀의 방에 난입하여 애인이 보는 앞에서 얼굴에 권총을 난사해 중상을 입힌다.
베셀이 입원한 후 이 사건은 공산당과 나찌당의 사활을 건 선전전으로 비화된다.
공산당은 사건 다음날 카를 리프크네히트 회관으로 잘름을 불러내 이 사건을 매춘부시비로 발생한 포주들간의 분쟁이라고 경찰에 진술할 것을 강요하였고, 베를린 관구장 요제프 괴벨스를 중심으로 한 나찌당은 이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닌 정치테러이며 사전계획된 고의적인 범죄라며 이에 맞섰다.
결국 베셀은 회복하지 못한채 약 한달전 사고로 사망한 동생 베르너 베셀의 뒤를 이어 다음달 23일 사망한다. (동생도 돌격대원이었다)이후 사건은 경찰수사 결과 공산당의 계획된 범죄로 확인되었다.
3월 1일 베셀의 장례식이 열린 날에도 공산당은 경찰의 저지선을 무시하며 난동을 부렸다. 폭도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돌을 던지고 총을 쏘며 운구행렬을 방해하였으며 죽은 베셀을 포주라 조롱하며 끝까지 고인을 욕되게 하였다.
장례식은 베를린의 성 니콜라이 묘지에서 열렸으며, 요제프 괴벨스의 주관하에 헤르만 괴링, 돌격대장 프란츠 폰 페퍼, 전 독일황제 빌헬름2세의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등 베를린의 나찌주요인사들이 참석하였고, 나찌당원과 돌격대 대원들에 의해 엄숙히 치뤄졌다.
장례식장에서 처음 불려진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는 이후 <독일인의 노래>와 함께 제3제국의 국가가 되었다.
추모기간이 끝난 후 같은 해 살인범 알베르트 횔러는 돌격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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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니콜라이 교회 묘지에서 거행된 호르스트 베셀의 장례식>

흔히 바이마르정권시절 타 정당원과 힘없는 서민을 괴롭히는 정치깡패의 대명사로 묘사되는 나찌의 돌격대 역시 나찌와 제3제국에 대한 대부분의 내용이 거짓이듯이 알려진 바와 다르다. 그 당시 독일의 거의 모든 정당이 준군사조직을 보유하였으며, 나찌의 돌격대 역시 가장 유래가 깊고 폭력적이고 규모가 큰 공산당의 준군사조직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적인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며 베셀사건에서 보듯 공산당에게 힘과 조직에 밀려 돌격대원들이 희생되는 경우가 잦았다.
공산당의 흑색선전으로 인해 난데없이 매춘부를 착취하는 '포주'가 된 호르스트 베셀은 아직도 유태영미가 주도하는 왜곡된 '승자의 역사' 속에서 순교자가 된 야바위꾼, 불한당, 포주 등으로 그려지며 여전히 악의적인 묘사속에서 모욕되고 있다.



1943

카사블랑카 회담 개최

카사블랑카 회담(Casablanca Conference)은 1943년 1월 14일부터 26일까지 프랑스령 모로코 카사블랑카 앙파 호텔에서 벌어진 연합국 수장들의 회담이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과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그리고 자유프랑스의 앙리 지로, 샤를 드골 등이 참석하였다.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스탈린도 초대되었으나 스탈린그라드공방전으로 인해 참석하지는 못하였다.
회담에서 종전조건으로 추축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채택하였으며, 이탈리아 시실리 상륙작전, 독일본토에 대한 공습계획, 태평양전쟁운용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이에 대해 독일은 결사항전의 다짐으로 응답했으며 2월 18일 열린 나찌당의 체육궁전 집회에서 이 같은 요구를 단호히 무시하는 것으로 연합국의 요구를 일축하였다.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논의된 전후 독일에 대한 처리방안은 이후 이듬해 열린 퀘벡회담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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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회담에 참석한 연합국대표들 의자에 앉은 루스벨트와 처칠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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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된 프랑스의 이미지를 조작하기 위해 오랜 앙숙인 앙리 지로와 샤를 드골을 억지로 악수시키고 있는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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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9 05:12 2012/01/29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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