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7일, 아리안 소사
분류 :
아리안역사
Published : 2012/02/02 13:04
1885
팔켄호르스트 출생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Nikolaus von Falkenhorst, January 17 1885 – June 18 1968)는 1885년 브레슬라우에서 유서깊은 프로이센 군부가문 출신으로 태어나 1,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여한 제3제국의 군인이다.
촉망받는 군인이었던 그는 1차대전 패배 이후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한 군부인원감축에도 불구하고 군인으로 계속 복무하며 1932년 중령으로 승진하여 프라하의 무관을 거쳐 소장으로 승진하고 폴란드전쟁 이후 보병대장으로 진급한다.
1939년, 소련이 핀란드를 점령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추진한다. 독일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대한 방어적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해군 제독 에리히 레더와 독일국방군최고사령부(OKW)의 알프레트 요들 작전부장은 이에 대한 작전계획을 검토한다.
1940년 2월 20일, 히틀러는 연합국과의 일전을 앞두고 북해해안선과 스웨덴 철광석, 영국공격을 위한 노르웨이 주요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스칸디나비아반도 점령계획인 베저위붕(Weserübung)작전을 추진한다.

<친필사인이 들어있는 팔켄호르스트 장군의 브로마이드>
히틀러의 호출을 받은 팔켄호르스트는 시간이 촉박한 비밀작전지시를 하달 받고 문방구에서 노르웨이 관광가이드북을 구매하여 단시간내로 작전계획을 기안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1940년 4월 9일, 베저위붕 작전이 개시되어 초광속으로 항복한 덴마크에 무혈입성한 독일군은 노르웨이에서 연합국과 교전 끝에 6월 9일에 노르웨이 전략요충지 나르비크 항구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6월 10일에 노르웨이를 접수하였다.
베저위붕 작전 사령관이었던 팔켄호르스트는 1944년까지 노르웨이 주둔 독일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팔켄호르스트는 점령지 주민들의 호응과 협조얻기 위해 휘하 주둔군에게 친절과 상냥한 태도를 당부하는 등 우호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제3제국 패전 후, 영국-노르웨이 군사법정에서 전범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20년형으로 감형되어 수감 중이던 1953년 건강악화로 출소한 후 독일중부 홀츠민덴에서 1968년에 사망하였다.
1942
라이헤나우 사망
발터 폰 라이헤나우(Walter von Reichenau, 8 October 1884 – 17 January 1942)는 부유한 프로이센 명문군부가문에서 태어나 제1차대전, 폴란드, 프랑스, 독소전에서 활약한 제3제국의 원수이다.
1903년 입대한 라이헤나우는 1차대전에서의 맹활약으로 1급철십자 훈장을 받고 대위로 진급하였다. 1차대전 종전 후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한 군부감축에도 군에 남아 영전에 영전을 거듭하며 1932년에 대령으로 진급하고 1933년에는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휘하에서 국방부 장관국장을 지낸다.
나찌정권 출범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지도력에 감화된 라이헤나우는 히틀러와 나찌당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고 군부요인 중에서는 처음으로 나찌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1938년 4군사령관에 취임한 후 슈테텐 지방과 체코 합병에 기여하며 승승장구하던 라이헤나우는 블롬베르크-프리치 스캔들이 터지자 차기 육군총사령관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나, 지나치게 나찌에 열광적이라는 이유로 그의 상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가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39년 제2차대전이 발발하자 폴란드, 벨기에에서 활약하며 프랑스정벌 이후 원수에 취임하였다.
1941년 독소전이 시작되자 제6군사령관으로 참전하게 되었고 10월 10일, '전쟁 중 유태인과 공산주의자에게 자비심을 보이지 말라는 취지의 <라이헤나우 명령서>를 발표하였고 실제로 라이헤나우의 부대는 유태인에 대한 처형을 직접 집행하였다.
이는 친위대 특무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이 담당하던 유태인과 공산당 인민위원 및 빨치산에 대한 진압과 처리에 국방군이 직접 개입하였다는 자료로 전후 승전국에 의해 전쟁범죄의 증거로 크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만슈타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부전선 장군들이 훈시한 내용이었으나 공문서로 명기되었다는 점과 라이헤나우가 노골적인 히틀러지지자였다는 점, 그리고 종전 전에 사망하여 변론의 기회가 없었다는 점 등이 요인이 되어 독소전 전범행위의 대명사로 굳어지게 되었다.
한편 1941년, 남부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는 총통의 진군지령에 대해 누적된 피로로 추가적인 진군이 불가능하다며 항명하다 해임되고 라이헤나우가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공석이 된 라이헤나우의 6군사령관 자리는 야전군 경험이 일천한 6군참모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맡게 되어 후일 스탈린그라드의 악몽으로 이어지게 된다.
1942년 남부집단군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1월 15일, 영하 40도가 넘는 러시아의 맹추위 속에 행군을 이끌던 라이헤나우는 뇌출혈로 쓰러져 후송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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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4월 9일, 베저위붕 작전이 개시되어 초광속으로 항복한 덴마크에 무혈입성한 독일군은 노르웨이에서 연합국과 교전 끝에 6월 9일에 노르웨이 전략요충지 나르비크 항구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6월 10일에 노르웨이를 접수하였다.
베저위붕 작전 사령관이었던 팔켄호르스트는 1944년까지 노르웨이 주둔 독일군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팔켄호르스트는 점령지 주민들의 호응과 협조얻기 위해 휘하 주둔군에게 친절과 상냥한 태도를 당부하는 등 우호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제3제국 패전 후, 영국-노르웨이 군사법정에서 전범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20년형으로 감형되어 수감 중이던 1953년 건강악화로 출소한 후 독일중부 홀츠민덴에서 1968년에 사망하였다.
1942
라이헤나우 사망
발터 폰 라이헤나우(Walter von Reichenau, 8 October 1884 – 17 January 1942)는 부유한 프로이센 명문군부가문에서 태어나 제1차대전, 폴란드, 프랑스, 독소전에서 활약한 제3제국의 원수이다.
1903년 입대한 라이헤나우는 1차대전에서의 맹활약으로 1급철십자 훈장을 받고 대위로 진급하였다. 1차대전 종전 후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한 군부감축에도 군에 남아 영전에 영전을 거듭하며 1932년에 대령으로 진급하고 1933년에는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휘하에서 국방부 장관국장을 지낸다.
나찌정권 출범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지도력에 감화된 라이헤나우는 히틀러와 나찌당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고 군부요인 중에서는 처음으로 나찌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IOC의원까지 지낸 열렬한 국가사회주의자 발터 폰 라이헤나우>
국방군 군무국장으로 재직 중인 1934년에는 독일 군부를 돌격대(SA)의 휘하에 조직하려는 돌격대 참모장 에른스트 룀을 제거하지 않으면 군부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군부의 의향과 예상되는 반응을 헤르만 괴링과 하인리히 히믈러 등에게 전달하여 룀과 나찌에 비우호적인 보수파를 제거하는 '장검의 밤' 사건이 일어나는데 일조하였다.1938년 4군사령관에 취임한 후 슈테텐 지방과 체코 합병에 기여하며 승승장구하던 라이헤나우는 블롬베르크-프리치 스캔들이 터지자 차기 육군총사령관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나, 지나치게 나찌에 열광적이라는 이유로 그의 상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와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가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39년 제2차대전이 발발하자 폴란드, 벨기에에서 활약하며 프랑스정벌 이후 원수에 취임하였다.
1941년 독소전이 시작되자 제6군사령관으로 참전하게 되었고 10월 10일, '전쟁 중 유태인과 공산주의자에게 자비심을 보이지 말라는 취지의 <라이헤나우 명령서>를 발표하였고 실제로 라이헤나우의 부대는 유태인에 대한 처형을 직접 집행하였다.
이는 친위대 특무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이 담당하던 유태인과 공산당 인민위원 및 빨치산에 대한 진압과 처리에 국방군이 직접 개입하였다는 자료로 전후 승전국에 의해 전쟁범죄의 증거로 크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만슈타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부전선 장군들이 훈시한 내용이었으나 공문서로 명기되었다는 점과 라이헤나우가 노골적인 히틀러지지자였다는 점, 그리고 종전 전에 사망하여 변론의 기회가 없었다는 점 등이 요인이 되어 독소전 전범행위의 대명사로 굳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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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전선에서 작전을 구상 중인 라이헤나우, 히틀러와 겸상 중인 라이헤나우>
히틀러는 라이헤나우 명령서를 보고받고 최고의 칼럼이라 극찬하며 이를 일선부대에 배포할 것을 지시하였다.한편 1941년, 남부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는 총통의 진군지령에 대해 누적된 피로로 추가적인 진군이 불가능하다며 항명하다 해임되고 라이헤나우가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공석이 된 라이헤나우의 6군사령관 자리는 야전군 경험이 일천한 6군참모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맡게 되어 후일 스탈린그라드의 악몽으로 이어지게 된다.
1942년 남부집단군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1월 15일, 영하 40도가 넘는 러시아의 맹추위 속에 행군을 이끌던 라이헤나우는 뇌출혈로 쓰러져 후송 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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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라이헤나우 명령서를 보고받고 최고의 칼럼이라 극찬하며 이를http://www.drdrebeatssaleuk.com/dr-dre-beats-studio-on-ear-headphone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