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 2012/05/27 13:41


1934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 체결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Deutsch-polnischer Nichtangriffspakt, 영 German–Polish Non-Aggression Pact)은 독일-폴란드 부전조약이라고 불리우며 1934년 1월 26일, 조약의 당사자인 제3제국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와 폴란드의 독재자 유제프 피우스츠키(Józef Piłsudski) 원수의 이름을 따서 피우스츠키-히틀러 조약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약은 베를린에서 양국 지도자를 대신하여 독일 외무장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와 주독일 대사 유제프 리프스키 간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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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주폴란드 독일대사 한스-아돌프 폰 몰트케, 폴란드 독재자 유제프 피우스츠키, 독일 국민계몽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크의 모습. 1934년 6월 15일 바르샤바에서 한컷.




조약의 내용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은 10년 기한의 조약으로 당시 중부유럽의 긴장완화와 전쟁방지를 위해 맺어졌다.

. 독일 폴란드 정부는 양 국가간 지속될 평화의 보증이 유렵 전체의 평화유지의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에 합의한다.
. 양국 정부는 1928년 프랑스협약의 원칙에 의거하여 상호관계를 유지할 것이며 본 조약에서 양국간 세부 조항을 명확히 하는데 합의한다.
. 양국 정부는 제3제국에게 부담하는 국제적약정이 평화적 상호관계를 해치지 않고, 본 조약에 의해 영향받지 않음을 명확히 한다.
. 양국 정부는 본 조약에 국제법이 적용될 경우, 국내 문제로 규정되는 사안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임을 명확히 한다.
. 본 조약으로 인해 폴란드가 이전에 체결한 조약은 이 조약으로 인해 영향받지 않는다.
. 분쟁이 발생하였을 시 상호간 합의에 기초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한다.
. 어떠한 상황에서도 분쟁의 해결방안으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을 합의한다.




폴란드의 입장

모든 국가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전쟁은 국민의 삶과 국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호전적으로 보이는 위정자도 전쟁의 위기상황에서 열매를 따먹을지언정 정작 전쟁을 원하지는 않는다.
유럽중심부에서 발생한 1, 2차세계대전으로 수백년간 지속되던 유럽의 패권은 유럽 대륙 바깥으로 넘어갔다.
당연한 결과가 예상되었기에 유럽의 지도자 그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 주변부에 위치한 은행가나 산업국가를 제외하고는 전쟁은 이득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하지만, 유럽중심부에 위치하고도 1차대전으로 재미를 본 국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폴란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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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독재자이자 독립영웅 유제프 피우스츠키



1차세계대전의 결과로 어부지리 독립을 쟁취한 폴란드는 동서 국경을 맞대고 있던 양대 강대국 독일제국과 러시아제국 양측이 서로 다른 진영이면서도 나란히 패전하는 행운을 맞이하였다.
중부유럽 최강의 육군을 보유한 폴란드는 그틈을 타 1차대전 종전과 동시에 독일의 동프로이센을 꾸준히 도발하였고, 동쪽으로는 소련을 침략하여 우크라이나영토를 점령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폴란드가 양면의 강대국을 도발하는데는 자국 군사력에 대한 만용과 더불어 든든한 우방인 영국과 프랑스가 있었기에 가능한 측면이 있었다.

독일에 대한 보복으로 가득찬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동프로이센과 독일영토를 분리하는 단찌히(Danzig, 현재 그단스크)회랑의 존재가 독일과 폴란드의 주요한 분쟁요소가 되었다.

유약한 정권의 대명사인 바이마르 정권마저도 이에 대한 부당함을 지속적으로 국제사회에 제기하며,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했으며 합리적인 총리로 평가되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 역시 폴란드의 독일영토점유를 보장하려는 요구에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33년 1월 30일,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이 집권하여, 독일의 국력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가운데 베르사이유 조약의 독일에 대한 제재와 영토민족문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수면위로 오르자 폴란드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주변 강대국이 약화된 틈을 타 양국의 영토를 점령한 폴란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베게삼아 자는 상황이었다. 이미 소련과는 1932년 7월 25일에 폴란드-소련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상태였지만, 이제 독일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이 최대의 관건이 되었다.
폴란드의 피우스츠키 정권은 전통적 우방국인 프랑스에 독일에 대한 전쟁을 제의한다.
독일이 강해지기 전에 협공을 통해 예방전쟁을 수행하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에 의해 거절된다.



프랑스의 입장

1차세계대전 연합국 승전의 주축은 프랑스였다. 독일의 1차대전 침공작전인 슐리펜계획을 막아낸 것도 프랑스였고, 루덴도르프가 지휘한 최후의 공세를 막아낸 것도 프랑스였다. 지긋지긋한 참호전의 무대 역시 프랑스영토였다.
다른 유럽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역시 추가적인 전쟁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프랑스를 위시한 승전국들의 전쟁예방계획은 패전국의 분할과 부흥을 막기 위한 제재조치와 막대한 배상금의 부과였다.
패전국을 분할하기 위해 제창된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 오스만투르크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공중분해되었지만, 독일은 분해되지 않았다. 독일은 이민족을 지배하지도 않았고, 식민지도 거의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부활을 막기 위해 영토의 할양, 군사력의 제한, 배상금 부과 등의 다양한 보복조치로 구성된 베르사이유 조약이 강요되었다.

. 독일의 알자스-로렌 지방 프랑스 귀속
. 독일 북부 지방의 덴마크 귀속
. 독일 동부 지방의 폴란드 귀속
. 남부 티롤 이탈리아 귀속(대표적인 독일계 지역)
. 슈테텐 지방 체코에 귀속(상동)
. 단찌히 독일에서 분리되어 자유시 선포
. 라인란트 비무장지대 선포
. 자를란트주의 15년간 국제연맹 통치(1935년 주민투표로 다시 독일로 귀속)
. 독일 대포, 항공기, 장갑차, 군함의 연합군 양도
. 독일 육해군병력 총 10만명 제한
. 독일 공군보유 금지
. 전차의 개발과 배치 금지
. 1320억 마르크 배상 판결
. 농산물과 전봇대용 목재 등 현물 배상 판결
. 독일 기업의 특허권 박탈
. 기존 식민지 포기


하지만, 대부분의 조약들은 히틀러에 의해 차례차례 폐기되었다.

1320억에 이르는 막대한 보상금 역시 미국의 중재로 도스안(1924), 영안(1930) 등이 제안되면서 현실화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비용으로 빌려준 차관을 회수하기 위해서 미국은 배상금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럽 본토의 대표적인 공업국가 독일의 재건 또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국제정세 속에서 프랑스는 단독으로 독일의 부흥을 견제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한 폴란드는 독일에 대한 선제공격을 모의하기 위해 프랑스에 예방전쟁을 제의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생각은 달랐다.
독일이 프랑스에 실질적인 위협으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독일이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전쟁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프랑스 국경까지 오기에는 수많은 우선순위들이 있었다.

프랑스 역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독일에 대한 전력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독일이 선제공격한다고 해도 이를 충분히 방어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1927년, 착공된 마지노선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독일제국의 파상공세를 참호전에서도 막아낸 프랑스로서는 마지노선까지 완비된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또한, 독일을 둘러싼 우방국들과의 군사조약으로 독일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프랑스 수뇌부는 1차대전의 전술과 전략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
전쟁의 성패는 보병의 숫자와 참호의 견고함에서 갈린다고 판단하였다.
체코의 1천2백만명 인구와 3천만의 폴란드, 4천6백만명의 프랑스 인구에서 보병을 차출한다면 6천5백만 인구의 독일을 충분히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프랑스는 마지노선의 토목공사와 인구수의 숫자놀음에서 오는 자신감으로 군복무를 1년으로 단축하는 선심성정책까지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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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삽질공사의 상징 마지노선



그러나, 프랑스의 이러한 전략에 헛점이 있었다.
프랑스, 체코, 폴란드의 보병전략의 수치적 '우수성'으로 독일을 포위했지만, 이같은 방위전략은 영국의 참전이라는 전제 하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프랑스가 침략당할 시에만 파병하게 되어있었고, 프랑스는 자국의 전력구성 상 영국의 도움이 있을 시에만 폴란드와 체코에 대한 지원이 가능하였다.
이같은 전략의 가장 큰 헛점은 독일이 프랑스를 선제공격하는 대신 폴란드나 체코를 공격할 시에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2차대전이 발발하자 이같은 맹점이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운명 역시 구태의연한 방어위주의 군편성으로 인해 앞서 언급한 동맹국들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된다.



독일의 입장

히틀러 집권 후 독일 제3제국은 국가를 재건하고, 부당한 베르사이유조약을 철폐하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였다.
이에 대해 가장 큰 걸림돌은 폴란드였다.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군대가 배상금 지연을 이유로 루르공업지대를 불법점령하기도 하였지만, 1차대전 종전 이후 꾸준하게 동프로이센 영토를 도발하던 국가는 폴란드였다.
단찌히 자유시의 존재 뿐 아니라 폴란드의 위협은 독일국민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폴란드의 도발과 월권행위는 바이마르 정부의 무기력함의 상징이었고, 이에 대한 국민감정의 결집과 강한 독일에 대한 염원은 나찌당 집권의 밑거름이 되었다.

프로이센국민들은 역사적으로 피지배층이었던 슬라브인에게 굴욕을 당한다는 현실을 참기힘들어하던 상황이었다.
독일의 전통적인 지배층인 프로이센군부 또한 폴란드에 대한 보복이 최우선과제라고 보았다.
하지만, 히틀러는 서두르지 않았다.
실질적인 군사력에서 우위를 지닌 폴란드를 후순위로 돌리고 자를란트, 라인란트, 오스트리아, 슈테텐, 체코 순으로 제국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같은 행보의 시작이 독일-폴란드불가침조약의 체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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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월 13일, 자를란트 주민투표 결과 독일 귀속 확정 소식을 통보받는 아돌프 히틀러.



독일은 침공은 커녕 방어도 어려운 전력을 가진 상태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여부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차례차례 수복을 진행하였다.
실제로 히틀러는 프로이센출신이 아닌 독일남부 오스트리아 출신이어서인지 여타 제3제국 국민에 비해 폴란드에 대한 적개심은 크지 않았다.
이같은 점이 조약체결의 이유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실은 히틀러가 국제정세에 충실한 현실정치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약의 파기

폴란드는 독일-폴란드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자국의 안위를 모색하면서도 프랑스와의 동맹체제는 계속해서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본 조약으로 인해 이전의 동맹관계와 각종 조약이 영향받지 않는다는 문구를 삽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합의한 내용으로 인해 프랑스의 외교적 지위가 약화되었으며, 프랑스와의 동맹관계도 소원해지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또한 본 조약의 체결 이후 동맹3국 포위작전에 치충하기보다 미래에 발생할 독일의 선제공격을 방어하는 방어선구축에 주력하게 되어 독일에 대한 견제가 느슨해졌다.

히틀러는 애초부터 폴란드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궁극적인 적은 소련공산주의자였고 폴란드는 소련의 공산주의를 지키기 위한 동부최전선의 우방이 되기를 원했다.
1938년 10월,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는 단찌히 자유시 독일 재편입과 동프로이센과 독일본토를 연결하는 도로 및 철도의 부설과 함께 상호불가침조약을 제안하였다.
폴란드는 이를 거부하였다. 무책임할 정도의 동맹국에 대한 신뢰는 계속되었다.
1939년 4월 28일, 제3제국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제국의회 연설에서 독일-폴란드불가침조약의 파기를 선언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계속해서 독일의 제안을 거부하고 영토의 반환을 거부하였다.
1939년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조약)이 전격적으로 체결되었다.
같은해 9월 1일 독일-폴란드 전쟁이 개시되었다.
폴란드의 동맹국인 영국,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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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7 13:41 2012/05/2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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